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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창업주 故 정주영회장

by 젬마네 2023.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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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국가의 성장과 현대의 성장을 함께 이루어낸,

우리 경제의 거목 정주영 현대그룹 설립자에 대해 알아보자 

 

현대그룹 창업주 故 정주영 회장은 일제 강점기 조선시대에 태어나 1940년대 초반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 서비스(Art Service, 현대건설의 전신)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6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고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으며 건설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뛰어난 상업과 기업경영 능력으로써 현대그룹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1.  故 정주영 회장의생애 초반기

 

1) 정주영의 출생

故 정주영 회장의 생애 초반기를 살펴보면 공부보다는 상업에 머리가 트인 것 같다. 정주영의 출생은 1915112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아산(峨山)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1930년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하였고 그와 함께한 동창생은 27명이며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하다.  

2) 상업을 익히다

보통학교 시절 공부를 잘하였으나 공부하기 싫다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하던 농사도 하기 싫어했다. 그다지 가난하지 않고 부유한 편이었으나 국가가 가난했기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다가 결국은 가출에 성공하면서 상업을 익히게 된다 첫번째 가출은 청진의 개항공사와 제철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을 해서는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세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의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네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인천 중구 신포동(도로명:신포로)에 위치한 인천항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배달원 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을 나온 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 가마가 되었다.

3) 변중석 여사와 결혼

일제강점기인 19351123일 밤 변중석 여사를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다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변중석 여사와 결혼식을 올렸다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결혼후 1938년 주인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쌀가게를 물려받아 경일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경일상회는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폐업해야 했다.  

2. 정주영의 생애 중반기 활동

1) 자동차 공장 설립

정주영의 생애 중반기 활동을 살펴보면 아도서비스 수리공장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경영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정주영은 1940년 당시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李乙學)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하게 된다. 일제말기인 1941년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았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 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계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한다.  

2) 현대 자동차 공업사 설립

 

해방 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 공업사를 설립하였다또한 1947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19501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 원이었다. 그러나 그해 한국 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 후 미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3)  전후 복구 사업과 현대그룹 창립

한국 전쟁 직후 현대건설은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 건물 등을 복구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정주영 회장은 창업 전반기와 전후 복구 사업이 시기적으로 잘 맞았다. 전후 복구로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 1964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그 뒤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독 1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여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 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였으며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하였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1971년 1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197312월에는 중공업에도 진출하였다.  

4) 경제건설사업 참여

1971년 정주영 회장은 국가적인 경제건설사업 참여를 위해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유럽을 돌았다부정적인 반응만 받다가 1971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한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때 정주영은 우리나라 55백 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1966년에 발행된 500원 지폐 앞면에는 남대문 뒷면에는 거북선 함대가 그려진 지폐가 존재했다).   

1977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특혜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났다건축법 위반에 대해 징역 6월 벌금 500500만 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나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차남 정몽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되어 아들이 아버지 대신 처벌받는 전례가 만들었다.  

1978년에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4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1983년에는 현대전자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5) 사회 활동 참여

기업인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사회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며 한국지역사회학교 후원회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69년1969년 1월에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746월에는 한국과 영국의 민간 경제협력을 위한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 측 대표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고, 1970년대 중근동 지역 건설, 개발 사업을 성사시킨 뒤 1976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아랍 친선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7년부터는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제13대 회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했다1979년과 1980년에는 한국·아프리카 친선협회의 회장으로도 추대되었다.  

6)  88 서울올림픽 유치 추진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 주도로 88 서울올림픽 유치 추진 운동에 참여하였고19813월에는 88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조직되자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각국을 상대로 올림픽 유치 활동, 설득 작업을 추진했다198111월 88 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선임되고,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서울올림픽 사전 준비와 86 아시안게임 사전 준비활동을 추진하였고, 1982년부터 1987년에는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에 선출되었다1987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에 추대되고, 그해 5월에는 한국정보산업협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3. 정주영 회장의생애 후반기 활동

정주영 회장의생애 후반기 활동은 경제계가 아닌 정치계에서 활동을 보이게 된다 

  1) 정계 입문

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되었으며 그해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현대그룹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뒤 1992년 11월 초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 대통령 선거 출마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석패하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19941월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1996년 그해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의 한 사람에 추천되기도 했다.  

3) 방북과 금강산 개발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19982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다시 한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가 실시한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19986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27일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정부의 햇볕정책을 따른다는 뜻 외에도, 정주영 명예회장의 고향이 남한이 아닌, 북한영토인 강원도가 고향이라는 사실도 북한에 소를 가져간 이유이다. 이때 소 501마리와 함께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이때 그는 직접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을 설득, 남북 민간교류 중 큰 규모인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켜 그해 1118일 첫 출항하였으나 북한의 사업장 몰수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그는 1999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정주영은 198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하였다.  

4. 정주영의 사망

20005월에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하였다. 한편 현대그룹은 각기 분산되어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건설,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분리되었다한편 정주영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아내 변중석이 입원해 있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나중에 자택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2001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 뒤인 321일에 서울중앙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인 2001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 되었다. 이후 5년 뒤인 200611월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2008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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